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인리히 슐리만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북독일 메클렌부르크 노이부코에서 태어났다.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[[호메로스]]의 [[일리아스]] 이야기를 진실로 믿고 [[트로이 전쟁]]의 사실을 발굴, 확인하는 것이 꿈이었다.[* 어린 시절 슐리만은 같은 동네 소꿉친구였던 민나 마인케라는 소녀와 함께 트로이 유적을 찾아내자고 약속했다고 한다. 자서전에 의하면 [[첫사랑]]이었다고. 하지만 꿈을 이루기 앞서 가난부터 먼저 해결해야 했던 슐리만은 어느 정도 기반을 갖추고 나서야 민나에게 청혼했으나 그녀는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한 이후였다. 시간이 한참 흐르고 중년이 되어서야 트로이 유적을 발굴하는데 성공하였지만, 슐리만은 꿈을 이루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민나에게 자신이 결국 해냈다고 편지를 써서 보낸 것이라고 전해진다.] 1864년 [[러시아]]로 이주하고 장사를 하여 거부가 되자, 장사를 접고[* 이 과정에서 러시아 출신 아내와 갈등이 생겨 이혼하였고, 그리스에서 소피아를 만나 재혼하였다.] 1866년 [[파리(프랑스)|파리]]로 이주하여 고대사 연구에 착수하였고 [[그리스]] 일대를 탐사하면서 [[호메로스]]의 [[일리아스]]와 관련된 유적들을 탐구하였다. 그렇게 1870~1873년 [[오스만 제국]](현재의 [[튀르키예]]) [[차낙칼레]] 시 남쪽의 히실리크 언덕에서 대규모 발굴작업을 통해 그것이 [[트로이]] 유적이라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. 이후에도 세 차례나 히실리크 언덕 일대를 발굴하여 여러 층에 걸친 트로이 유적을 발견하였다. 슐리만은 이 중에서 제2층에 해당하는 유적을 [[트로이 전쟁]] 시기의 유적으로 판단하였다. 사실 그가 발굴한 히실리크 언덕의 제2층은 트로이 시대의 것이 아니고, 제6층[* 현재는 제7층으로 분류한.다]이 그것에 해당한다는 것이 1890년 슐리만과 함께 트로이를 재발굴한 빌헬름 데르베르트에 의해 밝혀졌다. 1876년 호메로스의 ‘황금이 풍부하다’고 쓰여진 그리스 아르고리스만 기슭의 [[미케네]] 고분을 발굴하였다. 이 발굴에서 경이적인 재물과 보화를 파냈을 뿐만 아니라, 그리스 이전의 문명인 [[에게해]]의 고대문명, 즉 [[크레타]] 문명 → 에게 문명 → 그리스 문명으로 흘러가는 [[에게해]] 문명의 계통을 밝혀내는 데 큰 기여를 한다. 슐리만은 미케네에 이어 크레타 유적까지 발굴하려 시도했으나, 이전에 슐리만이 약속을 깨고 트로이에서 발굴된 보물을 국외로 무단 반출시킨 전력이 있어서 오스만 정부[* 크레타섬은 19세기말에 가서야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한다.]가 그에게 비협조적으로 나왔고, 결국 슐리만은 크레타 발굴을 단념했다. 이후 슐리만은 오스만 정부를 설득해[* 황실 박물관 건립 비용 5만 프랑 기증과 고고학 전문가를 동행한다는 조건을 붙여 승인받았다.] 히실리크로 돌아가 여러 차레 트로이 발굴을 했다. 1890년 9월 1일 슐리만은 아테네로 돌아왔고, 귓속에 생긴 염증이 뇌까지 퍼져 수술을 받았으나 회복되지 못했다. 그는 그 상태로 나폴리 여행을 하던 중 호텔에서 병으로 숨졌다. 그 후 슐리만의 시신은 친구들에 의해 아테네에 있는 공동묘지에 묻혀 오늘날까지 그곳에 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